일제강점기 도이칠란트한인들의 독립운동 (3)

3.1운동 100주년 기념 특집기사 : 본 기사는 3.1운동 100주년 기념 특집기사로서 일제 강점기 독일에 거주한 한인들이 펼친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기존의 문헌이나 연구 결과물에 기초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한국언론진흥재단 후원>

일제강점기도이칠란트 한인들의 독립운동 (3)

  1. 독립운동 투쟁 기록() … 3.1독립운동 100주년 즈음에

박희석 본대학 일본한국학과 교수가 일본 측 문서를 분석한 결과 독일에서도 조직적인 독립운동이 이뤄진 사실 입증 독립운동 모의 장소 사진도 발견돼

– 1925년 독일 한인유학생 32인중 1인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한 이한호 광복 후 서독 초대총영사 2019년 건국훈장애족장 추서

독일에서 일제가 사찰한 한인들의 독립운동 모의 장소 (베를린=연합뉴스) 이광빈 특파원 = 일제강점기인 1925년 독일 포츠담에서 일제가 사찰하던 한인유학생들의 독립운동 모의 장소(연두색 화살표)로, 1975년 촬영된 모습이다. 2019.2.25 lkbin@yna.co.kr ※ 사진작가 지그프리드 리버렌츠 제공

최근에서야 올해 초 개봉한 영화 ‘말모이’의 실제 모델인 이극로 선생이 주목을 받고, 올해 3·1운동 100주년 기념 과정을 통해 조명이 이뤄지면서 독일에서도 한인들의 조직적인 독립운동이 이뤄진 사실이 입증되기 시작했다.

2019년 2월, 박희석 본대학 일본한국학과 교수는 대한민국 독립기념관에 소장된 1920년대 주독 일본대사관의 전문 등 일본 측 문서를 일본 측 문서를 분석한 결과 독일에서 일본 측이 한인들의 독립운동 활동을 사찰한 사실을 밝혀냈다.

일본 측 문서는 ‘주독 일본대사가 1925년 2월9일 일본 외무대신에게 발신한 전문’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이 같은 해 4월20일 외무성에 보낸 전문’이다.

박 교수는 한인들이 독립운동 모의를 했던 장소의 사진 자료도 확보해 연합뉴스에 제공했다. 사진은 1978년에 이 건물이 도로 확장공사로 철거되기 전인 1975년 촬영된 것으로, 촬영 당시 유치원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연합뉴스의 이광빈 베를린특파원은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이를 두 개의 기사(‘독 유학생 독립운동 일제가 사찰 … 비밀장소 사진 발견’과 ‘정기 비밀모임 집회 … 일제강점기 독 한인들의 독립운동’)로 작성, 2월 25일에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했다.

또한 박희석 교수는 본대학 일본한국학과에서 2019년 2월 베를린 자유대 한국학연구소로 자리를 옮긴 후 올해 10월1일 대한민국 문화재청에 ‘1920년대 베를린 한인유학생의 항일 독립운동 본거지는 독일 포츠담 한인학생구락부’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우리뉴스에서 10월15일 보도했듯이 대한민국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은 2019년 10월7일 “1923년 독일 훔볼트대서 한국어강좌 개설됐다”며, 한글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고루 이극로(李克魯, 1893~1978)가 독일유학 중이던 1923년 유럽 최초로 프리드리히 빌헬름대학(현재 훔볼트대)에서 한국어강좌를 개설했다는 독일 정부의 공식 문서를 공개했다.

새로운 사실은 1925년 독일 한인유학생 32인 중 1인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한 이한호 초대 서독총영사가 올해 3.1운동 100주년 기념 2019년 건국훈장애족장에 추서되었다는 사실이다.

 

유학생 독립운동일제가 사찰..’비밀모의장소 사진 발견

연합뉴스는 이 기사에서 “일제강점기에 독일에서 일본 측이 한인 유학생들의 조직적인 독립운동을 사찰한 문서 내용이 처음으로 확인됐다.”며, “1920년대 중반 독일 수도 베를린 인근에서 한인 유학생들이 모의했던 장소의 사진도 처음으로 발견됐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1920년대에 독일의 한인 유학생들이 조직적으로 독립운동을 해온 정황이 기록으로 확인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금까지 독일에서는 유덕고려학우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펼쳐졌을 것으로 추정됐지만, 1923년 10월 23일 독일 베를린에서 관동대지진 당시 일제가 저지른 만행을 널리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개최된 재독한인대회(在獨韓人大會)를 제외하고 조직적으로 움직인 정황은 밝혀지지 않았었다.

주독 일본대사관이 한인유학생을 사찰한 전문 (베를린=연합뉴스) 1925년 2월 주독 일본대사관이 독일 포츠담의 한인 모임장소를 사찰한 내용을 담은 전문으로 외무대신 앞으로 보냈다. 2019.2.25 lkbin@yna.co.kr ※ 독립기념관 소장자료

주독 일본대사가 1925년 2월 9일 일본 외무대신에게 발신한 전문에는 “베를린 근교에 있는 포츠담에 한인들이 모이는 곳이 있었다. 주소는 베를린 근교 포츠담의 알테 루이지엔슈트라세85번지(Alte Luisenstrasse 85 Potsdam)이다. 겉으로는 그냥 함께 만나 노는 ‘조선인구락부’라 하지만, 지난번 관동대지진과 관련해 전단을 만드는 등 실제 어떤 비밀작업을 하는 곳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직 어떤 조처를 하지는 않았다”고 적혀 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이 같은 해 4월 20일 외무성에 보낸 전문에도 “베를린에서 약 20∼30분 정도 기차로 가면 있는 포츠담에 조선인이 경영하는 조선식 식당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토요일, 일요일에 조선인 학생들이 모여서 만나고 있다. 조선인학생구락부다”라고 쓰여 있었다.

일본 측이 사찰한 유학생 조직은 유덕고려학우회(留德高麗學友會)로 보인다. 일본 측 전문대로라면, 이들은 포츠담의 알테 루이지엔슈트라세 85번지 건물에서 주말에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졌다. 알테 루이지엔슈트라세 85번지 건물은 이후 여러 차례 주소명이 바뀌었다가 1978년 철거됐다. 박 교수는 철거 전인 1975년 역사가 오래된 이 거리의 풍경을 기록한 사진 작가를 통해 최근 해당 건물 사진을 입수했다.

독일 거주 한인 사찰에 대한 조선총독부 전문 (베를린=연합뉴스) 이광빈 특파원 = 1925년 4월 조선총독부는 독일 베를린과 포츠담의 한인들의 움직임을 사찰한 내용의 전문을 만들어 본국에 보냈다. 2019.2.25 lkbin@yna.co.kr ※독립기념관 소장자료

 

박 교수는 “일본 측 기록을 볼 때 알테 루이지엔슈트라세 85번지에서 관동대지진 관련 집회에 대한 모의가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면서 “전문을 통해 유학생들이 조직적으로 독립을 위한 활동을 벌여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독일에서는 유덕고려학우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벌어졌을 것으로 추정됐지만, 베를린 집회를 제외하고 조직적으로 움직인 정황은 밝혀지지 않아 왔다.

일본 측은 한인 유학생들의 움직임을 사찰해왔지만, 전문에 “아직 어떤 조처를 하지는 않았다”고 적힌 것을 고려할 때 직접적인 탄압을 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박 교수는 “한인 유학생들이 대부분 중국 국적을 가진 뒤 독일로 넘어와 일본이 직접 조처를 할 경우 국제적인 문제가 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1920년대 獨한인들의 독립운동 모의 장소였던 포츠담의 도로 (베를린=연합뉴스) 이광빈 특파원 = 1920년대 독일 베를린 및 포츠담의 한인들이 모여 독립운동을 모의한 건물이 있던 자리(도로 한복판)로, 해당 건물은 1978년 도로 확장으로 철거됐다. 2019.2.25 lkbin@yna.co.kr ※박희석 교수 제공

 

정기 비밀모임·집회일제강점기 한인들의 독립운동

포츠담의 한인 비밀모임 장소 주변 지적도 (베를린=연합뉴스) 이광빈 특파원 = 1920년대 독일 포츠담에서 한인들의 비밀모임이 이뤄졌던 장소 주변의 지적도로, 박희석 본대학 교수가 베를린에서 입수했다. 2019.2.25 lkbin@yna.co.kr ※ Dr.라이너 람브레히트 제공

연합뉴스는 이 기사에서 독일은 일제강점기 한인들의 독립운동 활동에 대해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나라’이며, 한인들이 조직적으로 독립운동을 벌였는지도 파악하기 어려웠는데, 박 교수의 일본문건 발굴로 조직적인 독립운동이 이뤄진 사실이 입증되기 시작했다는 의미를 부여했다. 연합뉴스는 또 이 문건을 토대로 일본 측은 베를린 인근 소도시 포츠담에 있는 건물에서 정기적으로 회합을 하는 한인들을 사찰했으며, 문건 내용상 1923년 10월 관동대지진 당시 베를린에서 벌인 항의시위(재독한인대회)도 이 건물에서 모의가 이뤄졌다고 밝혔다. 아울러 1927년 소민족압박반대대회에 참여한 것도 유덕고려학우회 및 포츠담의 한인 회합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또한 안중근 의사의 사촌으로 베를린에서 두부공장을 운영한 안봉근도 이 단체의 배후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면서, 그 근거로 유덕고려학우회의 사무실은 베를린의 칸트 슈트라세 132번지에 있었고, 안봉근의 주소는 인근인 칸트 슈트라세 122번지인 점을 들었다. 박 교수는 “안 봉근이 중국음식점에 조달하는 두부공장을 운영해 유덕고려학우회의 활동자금을 지원했을 것으로 추정이 가능하다”고 했다. 안봉근의 행적에 대해서는 학계뿐만 아니라 주독 한국대사관도 최근 추적하기 시작했으나, 아직 추가적인 사실이 발견되지 않았고 1930년대 이후 행적이 여전히 오리무중이라고 한다. 안봉근의 독립운동 활동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경기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손기정 기록에서 유추해볼 수 있다. 우승 당일 저녁 주독 일본대사관의 축하연에 가지 않고 한인축하연으로 향한 손 선생은 안봉근의 방에 걸려있는 태극기를 보았다.

한편 한인회합 사찰과 관련된 일본 측의 전문에 보면, 모임 장소 인근에 조선인이 경영하는 조선식 식당이 있었다고 나오는 것을 두고 연합뉴스는 “안봉근의 두부공장 외에도 한인들이 한식당을 운영한 정황도 나타났다.”고 했다. 그러나 박 교수는 그의 기고문에서 “1920년대 초에 독일 경제의 하락으로 화폐가치가 크게 추락하자 이들은 포츠담에 집 하나를 구해서 구락부를 만들고, 그곳에서 점심과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고 적혀있다”면서, 그 한국식 요리점은 이렇게 학생들이 ‘한국 음식’을 만들어 먹은 상황을 두고 말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1920년대 베를린 한인유학생의 항일 독립운동 본거지는 독일 포츠담 한인학생구락부

박희석 교수는 본대학 일본한국학과에서 2019년 2월 베를린 자유대 한국학연구소로 자리를 옮기고 난 이후 올해 2019년 10월 1일 대한민국 문화재청에 ‘1920년대 베를린 한인유학생의 항일 독립운동 본거지는 독일 포츠담 한인학생구락부’라는 제목으로 글을 기고했다.

이 글에서 박 교수는 베를린 일본대사관의 보고를 보면 유덕고려학우회는 1920년대 중반에 들어 한인회의 본연의 목적인 한인 학생들 간의 소통과 도움을 주기 위한 활동 외에 항일운동을 한 것으로 나타난다며, 이러한 활동의 실제적인 거점은 이 학우회가 있었다고 하는 베를린이 아니라 포츠담이라고 밝혔다. 포츠담은 베를린 서남쪽에 붙어있는 브란덴부르크의 주정부가 있는 곳으로 구동독지역이다

이 기고문에서 박 교수는 일본대사관의 보고서에 나오는 한인학생구락부가 있던 옛집의 사진과 위치를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점을 상세히 기술하고, 연합뉴스를 통해 2개 기사가 나간 뒤에도 몇 가지 의문이 남아 있었다고 전했다.

“왜 그들은 유덕고려학우회 사무실이 있었다고 하는 베를린이 아닌 포츠담에서 비밀모임을 가졌을까? 더구나 학생들이었던 그들이 어떻게 집을 따로 빌려 사용할 수 있었나? 그리고 그 일본 대사가 적은 한국식 한국요리점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런 의문이 남아 있어 그 후로도 여러 자료를 뒤적였다고 한다.

그때 박 교수는 1920년대 베를린에서 공부하면서 동아일보 특파원으로 있었던 낭산 김준연의 회고록 <나의 길>(1966)을 알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1923년 베를린 대집회를 주도한 그 김준연이었다고 한다. 이 책의 독일 편에는 김준연이 베를린 대학에 다녔지만 포츠담에 살았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집 임대비용이 적게 들고, 도시가 아늑하며, 베를린으로 가는 교통이 편리해서라고 했다. 더군다나 당시 포츠담에는 다른 한인 학생들도 살았다고 했는데, 낭산 김준연의 삶을 조명한 영암신문(2004년 6월 28일자)에는 김준연과 포츠담에 있었던 14명의 한인 학생들 이름이 들어 있다고 한다. 그들은 당시 베를린 대학에서 공부하던 한인 학생들이다.

1920년대 초 독일 경제의 하락으로 화폐가치가 크게 추락하자 이들은 포츠담에 집 하나를 구해서 구락부를 만들고, 그곳에서 점심과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고 적혀있다. 결국 베를린보다는 포츠담이 더 조건이 좋았으며, 그래서 한인 학생들의 구락부가 포츠담에 생겼다고 한다. 그 구락부 집은 독일 화폐 가치가 추락하여 빌릴 수 있었으며, 그곳에 모여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는 것이다. 그 한국식 요리점은 이렇게 학생들이 ‘한국 음식’을 만들어 먹은 상황을 두고 말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 박 교수 설명이다.

그러다 보니 베를린에 살던 한인 유학생들도 포츠담으로 왔으며, 그렇게 항일 독립운동의 준비작업이 그곳에서 있었으며, 바로 그것이 일본 대사가 주시했던 그 비밀정사라는 것이다. 박 교수는 끝으로 이제 그동안의 의구심이 어느 정도 해결됐으니 앞으로 이 역사적 사실과 관련하여 좀 더 많은 내용이 있는지 두고 봐야겠다고 다짐했다.

 

1925년 독일 한인유학생 32명중 1, 이한호 서독총영사 건국훈장애족장 추서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1925년 독일 내 유학생 32인중 1인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한 이한호(李漢浩) 광복 후 초대 서독총영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선생은 1895년 함경북도 성진 출신으로 1915년 10월 가족과 함께 북간도 두도구(頭道溝)로 이주하였으며, 3월 16일 두도구 현지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한 후 상해로 도항했다. 1922년 1월 현재 상해에서 이동휘(李東輝)(’95, 대통령장)가 이끄는 상해파 고려공산당에 속하여 활동하였으며 동년 6월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 국민대표회주비회의 독립방안 청취를 위한 연설회의 개최를 발기하고 8월 국민대표회 소집에 대한 지지의사를 밝혔다. 1923년 1월부터 5월까지 북간도 독립운동 단체인 맹호단(猛虎團) 단장 자격으로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해 독립운동 진영의 단결과 명실상부한 독립운동 최고기관 창설을 역설했다. 이후 독일로 건너가 학업에 몰두하였고 스위스 취리히대학에서 경제학박사를 받았으며, 광복 후 초대 서독총영사를 거쳐 경제사절단장으로도 활약했다. *

*출처: 대한민국 국가 보훈처 웹사이트

1925년 당시 독일 내 유학생은 32명으로 그 이름은 다음과 같다.

“공인태수학·계정식음악·김백평생물·김필수경제·김현준경제·김재훈음악김상수의학·김종성공과·김숙례문학·박성채?·박유진법학·박주병의학‧배운성예술·백준철학·안호상철학·원형택역사·윤건세법학·윤동섭문학이극로경제·이석중의학·이의경생물·이훈법학·이한호공학·장득우공학정상종경제·정석태의학·정석호음악·정세희?·최동선음악·최창헌공학황우일경제·황우림.”

(이 순 희, 유 종 헌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