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도이칠란트 한인들의 독립운동 (2)

일제강점기도이칠란트 한인들의 독립운동 (2)

  1. 독립운동 투쟁 기록() … 3.1독립운동 100주년 이전

독일 언론에 나온 3.1운동 관련 보도 = 독립기념관이 고혜련 뷔르츠부르크대학 중국학과 초빙교수를 통해 발굴한 3.1운동 관련 도이체알게마이네 차이퉁 기사(1919.3.22)로, ‘코리아의 소요사태는 진압되었다. 그곳은 다시 평온하게 됐다’는 내용이다. (출처=연합뉴스) 이광빈 특파원(2019-02-14)

독일은 대한민국의 3.1독립운동에 관하여 몇 줄 보도한 것이 전부다. 연합뉴스는 ‘독일 언론에 나온 3.1운동 관련 보도’를 통해 “일본은 공문 등을 통해 조직적으로 보도를 통제하려 했다”며 “이 때문에 독일에서는 초반에 몇 줄 단신으로 보도된 것 이외에 전혀 보도가 없을 정도였다”고 보도했다.

마찬가지로 일제 강점기에 독일에 거주한 한인들의 독립운동에 관한 기록도 그리 많지가 않다. 3.1독립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올해 새로운 자료들이 발굴되고 기록되기 이전에는 조직을 중심으로 적극적인 항일 독립운동을 펼친 기록을 입증하는 자료 또한 드물다. 이극로와 이미륵 등이 독일에서 벌인 활동의 일부가 입증된 정도다.

3.1운동 100주년 이전에 나온 자료로는 이정은 한국독립 운동사 연구소 책임 연구원이 ‘월간 독립기념관(1999 2월호 18쪽)’에 이미륵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쓴 ‘이미륵과 [한국의 문제]’가 있다. 2006년도에 홍선표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원이 독립기념관소장자료, 동아일보, 신한일보, 독립신문, 개인소장 자료들을 토대로 쓴 ‘1920년대 유럽에서의 한국독립운동’은 독일의 독립운동 연구에 있어서 교과서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2013년에 국사편찬위원회가 펴낸 ‘유럽 한인의 역사’, 2014년에 홍선표 연구위원이 저술한 ‘관동대지진 때 학살에 대한 歐美 한인세력의 대응’ 등이 있다.

당시 독일은 프랑스 등 타유럽 국가보다 생활비가 다소 저렴하여 노동자보다는 대체로 유학생들이 많이 거주했다. 1923년 최대 거주자가 88명(거류인 55명, 유학생 33명) 정도에 불과했으니 조직적으로 독립운동이 벌어졌으리라고 생각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나마 독일 한인들의 활동 기록은 1920년대 말부터는 찾아보기 힘들다. 독일이 초인플레이션*, 화폐개혁을 겪으며 한인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유학생들이 줄어들었다는 분석이다.

*독일은 1921년 본격적으로 전쟁 배상금을 영국과 프랑스에 지급해야 했다. 그런데 미국 등이 심각한 불황에 빠졌다. 독일 수출이 급감하면서 외환보유액이 줄었다. 당시 독일 정치인들은 긴축을 통해 내수를 줄여 경상수지를 흑자로 만드는 방법을 선택할 수 있었다. 이 길을 가면 기업 파산과 실업, 정치적 반발을 피할 수 없었다. 그들은 간편한 길을 선택했다. 종이돈을 마구 찍어내 외환시장에 팔아 외화를 조달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 바람에 1마르크가 2년 새 1조 마르크까지 치솟았다. 독일은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을 견디지 못하고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인플레 사냥이 한창이었던 1924~25년 독일에선 기업 파산과 실직이 급증했다.

[출처: 중앙일보] 똑같이 돈 풀었지만…독일, 살인적 인플레 고통, 미국은 대공황 이겨내

 

2017년도에는 독일의 한인독립운동사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사료가 될 만한 자료가 발굴 되었다. 이극로가 독일 베를린에서 유학하던 시절인 1923년 ‘재독한인대회’에서 작성·배포한 선언문인 ‘한국에 대한 일본의 폭압통치’, 1924년 출간한 <한국의 독립운동과 일본의 침략정책>(이하 <침략정책>)를 이보람 수집가가 발견했다고 언론이 보도했다. 이때 이극로가 1927년 출간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한 한국의 독립투쟁>(이하 <독립투쟁>)의 원본은 이미 조준희 국학인물연구소장이 먼저 발굴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이미륵과 [한국의 문제]

독일에서의 독립운동 투쟁 기록 중에는 이정은 한국독립 운동사 연구소 책임 연구원이 ‘월간 독립기념관(1999 2월호 18쪽)’에 이미륵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쓴 글 ‘이미륵과 [한국의 문제]’가 있다. 이 글에는 특히 세계피압박민족회의 참여 관련한 내용이 상세히 언급되어 있다. [한국의문제]라는 자료에 대한 설명도 상세히 나온다. 이정은 연구원은 이 자료를 세계피압박민족회의 대회에서 한국대표단이 일본의 지배하에 신음하고 있던 한국의 실정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기 위해 만들어 각국 대표에게 배포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이 자료는 독일 뮌헨대학 생물학부 동물학과의 이미륵 동기동창생이었던 샬러(Schaller)교수가 이미륵에게서 받아 40여 년간 간직해오다 1969년경 한국에서 유학 온 정규화 교수(성신여대, 독문학)에게 선사하여 1984년 7월 13일 독립기념관에 기증된 것이라고 한다. 이 연구원은 문서의 표지 아랫단에 이미륵이 연필로 ‘Brussel 10 Feb 27″이라는 표기와 두 줄의 글을 독일어로 적고 Mirok(미륵)이라는 자신의 서명을 남겨 그의 체취가 이 자료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고 적었다.

 

1920년대 유럽에서의 한국독립운동

2006년 12월 홍선표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이 ‘1920년대 유럽에서의 한국독립운동’ 이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발표했다. 홍 연구원은 그의 논문에서 “1925년 일제 측 통계를 보면 유럽 내 한인은 258명으로, 이 가운데 33명이 요주의 한인으로 분류돼 있었다”며 “유럽 거주 한인들은 소수에 불과한데다, 생활도 불안정하고 넉넉하지 못한 가운데서도 프랑스와 독일을 중심으로 조국 독립을 위한 다양한 선전, 외교활동들을 펼쳤다”고 밝혔다. 그는 “프랑스의 경우 한인노동자들이 주축이 된 재법한국민회(在法韓國民會)가 조직돼 파리한국통신부의 외교활동을 지원했으며 어려운 처지임에도 불구 한국독립을 위한 재정적 지원과 기근 등으로 생활이 힘든 국내 한인들에게 구휼금(救恤金-재난을 당한 사람이나 빈민을 돕는 데 쓰는 돈)을 보내기도 했다”고 서술했다. “독일에서는 노동자보다는 한인 유학생이 주축이 돼 유덕고려학우회를 결성하고 구제활동과 대임정 지원활동, 일제의 한인 학살에 대한 항일선전활동, 1927년 벨기에 피압박민족대회 대표자 파견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며 “이는 독일 내 한인 유학생들의 강렬한 민족의식과 독립정신을 잘 보여주는 특별한 사례”라고 설명했다.

 

일제 강점시 유럽에서의 조국광복운동

독일에서의 독립운동과 관련하여 독일 한인 동포사회에서는 2013년 5월 황성봉재독 언론인이 ‘일제 강점시 유럽에서의 조국광복운동’이란 제하의 글을 그의 블러그 역사 에세이에 올린 것이 처음인 듯하다. 그는 이 글에서 “홍선표 연구원이 밝혀낸 <재법한국민회>와 <유덕고려학우회>는 유럽 내에서 한인들이 세운 최초의 한인단체로 평가되고 있다.”면서, 그러나 이런 활동이 우리나라 사회에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학계에조차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면서 그 까닭은 당시 유럽에서 활동한 한국독립지사들 역시 모두가 사회주의 사상을 지녔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독립운동사를 제대로 정리하기 위해서라면, 유럽에서의 조국광복운동가들이 어떤 까닭으로 사회주의를 받아들였는지를 규명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독일어로 된 독립운동 출판물발굴

<한겨레>는 2017년 7월 25일자 ‘한글학자 이극로, 독일어로 된 ‘독립운동 출판물’ 첫 발굴‘보도에서 이극로가 독일 베를린에서 유학하던 시절인 1923년 ‘재독한인대회’에서 작성·배포한 선언문인 ‘한국에 대한 일본의 폭압통치’, 1924년 출간한 <한국의 독립운동과 일본의 침략정책>(이하 <침략정책>), 1927년 출간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한 한국의 독립투쟁>(이하 <독립투쟁>)의 원본을 확인했다고 보도했다. 이 자료들의 존재와 내용은 이미 알려진 바 있으나, 원본 발견은 이번이 처음이라면서, 이 자료들은 지보람(32) 수집가가 독일의 고서점에서 3~4년에 걸쳐 차례로 입수한 것이라고 소개했다.

그러나 한겨레는 아래와 같은 정정 보도문을 냈다. 1927년 출간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한 한국의 독립투쟁>(이하 <독립투쟁>)은 조준희 국학인물연구소장이 먼저 발굴했다는 것이다. (사진출처: 한겨레)

 

이극로의 독일어판 관련 정정보도문

– 한겨레는 지난 7월25일치 ‘한글학자 이극로의 독일어판 일제 규탄문 첫 발굴’ 기사에서 이극로의 독일어로 된 독립운동 출판물 3점의 원본을 입수한 수집가의 제보와 관련하여 원본 발견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보도한 바 있습니다.그러나 사실확인 결과, 이극로의 자료 중 1927년 출간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한 한국의 독립투쟁>은 조준희 국학인물연구소장이 처음 발굴한 것으로 밝혀져 이를 바로잡습니다.

이 보도는 언론중재위원회의 조정에 따른 것입니다. –

 

1917년 독일포로 고려인이 부른 독립운동가요

‘A study on Korean POWs songs recorded by German Anthropologist in 1917’은 1917년 3월 22일 독일전선에서 러시아 군인으로 투입된 연해주 한국인(고려인)으로부터 독일인 인류학자 뮐러교수가 채록한 노래들 중에서 1900년대 초기 항일 독립운동가 3곡을 중심으로 연구하였다. 1910년대부터 구전되어 가사에만 의존했던 독립운동노래를 1917년에 녹음된 자료에 의한 채보를 실현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 당시에 불렀던 항일가요의 복원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고 본다. 본 연구에서 안중근의 작사로 알려진 〈의거가〉(만났도다)의 작사자를 분명히 밝히고, 노래선율을 채보하여 후세대에 전달 할 독립운동가요에 대한 음악적인 내용과 노래 가사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였다. 우덕순이 작사한 〈의거가〉는 후세들에게 〈우덕순가〉, 〈만났도다〉, 〈이등도살가〉, 〈의거가〉 등의 변형된 노래제목들과 함께 가사에서 핵심적인 내용은 같으나 후렴구가 첨가되거나 말이 현대어로 다듬어진 노랫말로 전수되었음을 밝혀냈다.*

*김보희(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42집, 2012.08, 75 – 106

(최양현, 이순희 , 유종헌 기자 ) * 한국언론진흥재단 후원